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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내전인 남북전쟁 중반기의 대규모 전투. 1862년 9월 MBTI 성격유형검사 17일에 벌어졌으며, 북부측은 앤티텀 전투라고 부르지만 남부측은 샤프스버그 전투라고 한다.[1] 2. 전투 이전[편집] 남군의 로버트 E. 리는 자신의 휘하인 북버지니아군 4만 5천명을 이끌고 메릴랜드 주 방면의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미 반도 전역과 8월의 제2차 불 런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기가 높아져 있던 남군은 그때까지 계속된 방어전을 벗어나 전략적으로 공격에 나서 북부로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즉 메릴랜드 주를 장악해서 워싱턴 D.C.를 포위하고, 다시 이를 넘어 펜실베이니아 주까지 올라가서 필라델피아, 뉴욕, MBTI 성격유형검사 볼티모어 등 핵심 공업지대를 위협한다는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북군은 남군을 따라 전장을 끌려다니며 북진해야하므로 더이상 남부를 공격할 수 없게 되고, 이를 격파하거나 북부의 공업지대를 장악하면 유럽 열강의 승인을 얻어내면서 남부연합이 완전히 국제적인 승인을 받게 된다는 노림이었다. 이때 남군은 노예주였기에 남부에 동조적이었던 메릴랜드 주의 민심을 얻어 인적, 물적자원을 충당해보고자 했다. 남군은 군악대를 통해 매일같이 선전을 했는데, 이때 연주한 곡이 메릴랜드 나의 메릴랜드였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메릴랜드인들은 남군을 단순히 다른 주에서 온 침략자로 보았을 뿐이었다. 남군: "우리가 남이가?" 메릴랜드: "남이지. 어서 꺼져!!!" 그러나 MBTI 성격유형검사 리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부대를 둘로 나누어(롱스트리트군 1만 7천과 잭슨군 2만 8천) 하퍼스 페리를 점령하고 메릴랜드 주를 넘어 펜실베이니아 주로 북진하려고 하였다. 상대측인 북군의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브링턴 매클레런(1826~1885)은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 때 보여준 소극적인 지휘행태로 보아 이렇게 군을 나누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진격해오지 않을 것이라 예측한 것. 그러나... 북버지니아군 기동계획이 그대로 들어있는 특별명령 191호 사본이,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매클레런 손에 들어가 버렸다.[2]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병력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포토맥군이 분산기동하는 북버지니아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셈. MBTI 성격유형검사 이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란 리는 최대한 병력을 긁어모아 사우스 마운틴에서 지연전을 펴는 한편 스톤월 잭슨에게 하퍼스 페리를 최대한 빨리 장악한 후 달려오라고 명령한다. 사우스 마운틴 방어선이 돌파당하기 직전 잭슨이 하퍼스 페리를 점령, 도보 기병대의 명성에 걸맞는 속도로 달려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고, 잭슨이 하퍼스 페리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리는 집결지인 샤프스버그에서 일전을 결심한다. 이렇게 상황은 팽팽해졌고, 이제 승부만이 남았다. 3. 전투 개시[편집] 9월 17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하루였던 앤티텀 전투가 시작되었다(D-day도 이 하루에는 미치지 못한다!).[3] 전투는 샤프스버그 외곽에 구축된 남군의 방어선에 북군이 MBTI 성격유형검사 차례로 부딪쳐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남군은 이에 하퍼스 페리에서 달려오는 증원군을 오는대로 방어선에 계속해서 증원하는 방식으로 간신히 버텨내게 된다. 남군인 북버지니아군은 숫적으로 절대적 열세였으나[4] 북군의 축차투입된 공격과 지형적인 우세를 활용해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해내는 데 성공하면서 무승부에 가까운 전투결과를 이루어내었다. 이때 매클레런은 반도 전역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지휘로 몇 차례의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줘도 못먹는다더니[5][6] 반면에 리는 열세한 병력과 급한 행군으로 지친 병력을 지휘하면서도 달려온 증원군을 시의적절하게 방어선에 계속 투입해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최종 사상자 북군-1만 2천 4백, 남군-1만 3백. 얼핏 보면 무승부이긴 하지만, 북버지니아군은 수적인 한계가 있었던 탓에 그 타격은 더 심각할 수 밖에 MBTI 성격유형검사 없었다. 그럼에도 리는 다음날의 전투를 준비했지만, 다음날 북군은 두개 사단을 더 증원받아 3배에 달하는 절대적인 병력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매클레런은 리의 남군을 상대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고, 리 역시 그 상황에서 북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둘 수도 없었기에 메릴랜드에서 후퇴한다. 4. 전투 이후[편집] 에이브러햄 링컨은 매클레런이 북버지니아군을 궤멸시키지 않은데 대해서 대단히 실망감을 표시했다. 결국 매클레런은 포토맥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군인 경력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작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리웠고(본인이 바라기도 했고) 반도 전역의 전략적 구상을 보면 대담하고 스케일이 큰데다가 전후에 리가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북부 장군이라고까지 MBTI 성격유형검사 평가한 매클레런이 왜 이렇게 항상 소극적으로 당연히 이겨야할 전투들을 놓쳐버렸느냐에는 여러 의견이 나뉘는데, '전쟁이 빨리 끝나버리면 자신이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 싫었다'부터, '너무 좋은 기회라 함정이라 의심했다', '진지에 대한 공격으로 발생할 막대한 피해를 우려했다' 등의 해석이 있다. 허나 이유가 어찌 되었건 매클레런은 여기서 남북전쟁의 영웅이 될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후 링컨은 매클레런이 지닌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는 사령관으로 임명하지 않았다.[7] 한편 링컨은 당초 북군의 대승리 이후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할 계획이었는데,[8] 북버지니아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어도 메릴랜드 주에서 남군이 퇴각하긴 한 만큼 이를 기회로 전투 며칠후인 9월 22일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다. 노예해방선언은 유럽 각국이 남부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 외교적 효과를 거두었다. 비록 앤티텀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남부의 공세를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하였고 앞서 언급한 외교적 효과를 MBTI 성격유형검사 거두어 북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기타[편집] 앤티텀 전투는 게티스버그 전투와 함께 남북전쟁의 두가지 큰 분기다. 그래서 '특별명령 191호 사본'의 노획 이야기는 게티스버그 전투와 함께, 미국의 대체역사 계열에서 대단히 유명한 떡밥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 미국의 게임회사 탤론소프트(TalonSoft)의 턴제 전략게임인 배틀그라운드 시리즈 중 5번째 타이틀이 앤티텀 전투를 다루고 있다(Battleground 5: Antietam). 게임 발매년도는 1996년.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종족 전쟁(Brood War) 이전)의 테란 시나리오에서 아크튜러스 멩스크의 혁명은 마치 남북전쟁의 각 단계에 맞물려 비유된다(코랄의 후예의 상대가 남부삘 나는 테란 연합이기도 하고애초에 상징 깃발이 남부국기다.). 미 해군의 제7함대 소속의 이지스 순양함 8번함의 함명이기도 하다. [1] 보통 남부측 명칭은 도시명, 북부측 명칭은 자연물을 따른다. 앤티텀은 포토맥 강의 지류에 붙은 이름. 불 런 전투와 매너서스 전투가 같은 것과 동일하다. [2] 원칙대로라면 주요 지휘관에게 한 부씩만 전달되어야 하는 사본이, 남군의 불분명한 지휘체계 MBTI 성격유형검사 때문에 한 장군에게 2부가 전달되는 사고가 났고, 여분의 사본을 참모 중 하나가 담배 보관용으로 쓰다가 길에서 흘렸다. 보통이라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휴지쪼가리였겠지만, 하필 담배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담배냄새를 맡은 북군 병사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담배를 피면서 내용물까지 읽어보게 된 것. 한국 역사에서도 가야멸망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 신라가 승리한 일이 있다. [3] 사망자 수만 쳐도 진주만 공습이나 9.11 테러보다 많았다. [4] 북군-개전시 7만 5천, 전투 중반에 1만 2천의 증원군이 합세해 최종 전투 참여병력 8만 7천. 남군-개전시 2만 5천, 전투가 지속되면서 계속 증원군이 합세하여 최종 전투 참여병력 4만 5천. [5] 허나 이는 매클레런에 대한 MBTI 성격유형검사 지나친 폄하로 볼 수도 있는게, 남군의 우익은 앤티텀 크릭, 중앙은 참호처럼 되어버린 침하된 도로, 좌익은 숲 속이라는 방어에 극도로 유리한 지형에 배치되었고, 거기다 그 사이는 개활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이를 이용해 리는 전선에는 최소 요구 병력만을 배치한 상태에서 다수의 예비대를 운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북군이 전 전선에 걸친 돌파를 시도한다면, 북군은 전선이 고착된 상황에서 리의 예비대에게 측면을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적이 측면을 두들기려고 시도해도 다른 전선 병력을 유용해서 지킬 수 있도록 축차 MBTI 성격유형검사 투입한 매클레런의 판단은 옳았던 셈이다. [6] 앤티텀 전투 당시 매클레런의 지휘에 대한 비판(그리고 문제점)은 영문 위키피디아 등을 참고하는게 좋다. [7] 매클레런은 이에 대한 복수로 민주당의 지원을 받아 1864년 대선에 출마했고, 그렇게 링컨의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져버렸다. 선거인단 결과는 212(링컨)대 22(매클래런). 전체 투표수로는 55% 대 45%, 그가 지휘했던 포토맥 군단에서의 지지율은 30%였다(링컨은 70%). [8] 왜 하필 이 시기냐 하면 북군이 연전연패하고 있을 때에 노예해방선언을 해봐야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에 동원된 사단이 2개 더 많긴 하였으나, 연합군의 해군 및 공군의 상당수가 이 작전에 참가했고, 연합군의 서부전선 주공은 이날 노르망디에 상륙한 군인들이었다. 존 키건에 따르면 이탈리아 전역 등이 사실상 이 서부전선을 보조하기 위한 조공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훗날 서부전선을 이끌 군인들을 이 해안에 다 투입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2. 초기 상황[편집] 소련은 이미 동부전선에서 큰 피해를 보고 있었고, 유럽에서의 제2전선의 구축을 영미 연합군에게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다. 1942년, 이러한 요구로 인해 결국 정치적인 입장과 국민의 사기 진작, 그리고 독일군의 해안 방어 능력을 시험해 볼 겸 윈스턴 처칠 경이 야심차게 준비한 디에프 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특히 주력이었던 영국군과 MBTI 성격유형검사 캐나다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이 작전으로 인해 상륙작전의 기본이 뭔지를 깨닫는 성과도 있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상륙하면 망한다는 게 분명해졌므로 연합군의 제2전선 형성은 계속 연기된다. 그러자 연합군은 영국의 전략적 이점을 고려, 처칠 경이 아돌프 히틀러의 '부드러운 아랫배'라고 주장한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에 상륙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43년, 연합군은 시칠리아 상륙을 위해서 허스키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연합군이 시칠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겉으로는 히틀러의 편에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동시에 몰래 연합군과 교섭하고 있었다.[3] 결국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이탈리아 MBTI 성격유형검사 주둔 독일군(케셀링의 G집단군)과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투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독일군은 이탈리아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저항에 들어갔고, 연합군은 로마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독일군의 강한 저항에 휘말려 거의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1944년 1월, 연합국 수뇌부가 만난 카사블랑카 회담 뒤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주공을 감행할 연합군의 침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2달 뒤 트라이단트 회담에서 '오버로드' 라는 암호명의 상륙작전을 1944년 5월 1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수립은 연합군 MBTI 성격유형검사 최고사령부 참모장 모건 장군이 맡기로 하였으며, 며칠 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오버로드 작전의 세부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모건의 첫 임무는 침공 장소를 선점하는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의 파드칼레, 노르망디, 브르타뉴가 제시되었다. 결국 노르망디가 선정되었는데, 파드칼레는 영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이상적인 지형이 아닌 데다가 독일군이 이미 요새화를 마친 곳이었으며, 탱크와 중장비가 상륙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생각되어 보류되었다. 브르타뉴는 다른 지점에 비해 상륙하기 좋은 해안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으로 상륙하면 연합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너무 서쪽에 있어서 독일로 진격하기 힘들다는 MBTI 성격유형검사 이유로 보류되었다. 결국 노르망디가 최적의 장소로 뽑혔는데, 이유는 확실한 장점은 없지만 특출난 단점도 없는 무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상륙지를 노르망디로 결정한 이후에 연합군은 본격적인 작전 계획 수립과 병력 증원, 필요한 물자 생산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동시에 보디가드 작전, 포티튜드 작전 등 전체적인 병력 규모와 상륙지를 속이기 위한 각종 기만 작전들이 시행된다. 독일군이 매우 두려워한 패튼이 지휘하는 가상의 1군을 만들어 심리전을 거는 등 독일군을 계속해서 오판하게 만들었다.[4] 이렇게 양동작전과 군사물품 생산이 완료되어 언제든지 작전에 착수할 수 있게 된 연합군은 D-Day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D데이(D-day)로 처음 계획된 6월 4일은 파도가 심해 상륙할 수 없었고, 6월 6일 날씨가 잠깐 갠다는 소식을 들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상륙일을 6월 6일로 결정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천운인데, 당시 병력과 물자의 배치, 상륙작전의 여건(야간 공수부대 투하작전 당시 달빛 조명, 상륙 전에 영향을 끼칠 조수 간만의 차)을 고려해 볼 때 6월 초가 아니면 2개가 모두 최적인 날이 9월 이후에는 없었고, 만약 더 이상 지체할 경우 보안을 위해 2주나 MBTI 성격유형검사 격리되어있던 몇십 만에 달하는 병사들에게 더 이상의 보안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젠하워 본인도 이날로 결정하기 전 "총사령관 한 명의 선택에 너무 많은 것의 운명이 걸려 있다"며 고뇌했을 지경이다.[5] 3. 과정[편집] 3.1. 양측의 부대 구성[편집] attachment/Allie... 3.1.1. 연합군[편집] 연합군은 미군, 캐나다군, 영국군, 자유 프랑스군, 자유 폴란드군, 기타 영연방 소속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D-Day 하루 동안에 병력 8만 7천여 명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후 3주 동안 노르망디를 통하여 연합군 병력 156만 명과 차량 33만 3천 대가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의 숨통을 죄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륙부대의 자세한 배치는 아래와 같다. 아래를 보면 미군 병력은 모두 육군 소속인 것을 알 수 있다.[6]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는 대부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고 육군이 유럽 전선을 맡았다. 해병대는 본래 규모가 큰 조직이 아니다 보니,[7] 독일 다음 순위로 지정된 일본군을 상대로 지연전이 진행되던 MBTI 성격유형검사 태평양에서만 싸우기도 벅찼다. 태평양에서조차 실제 투입된 병력 숫자는 육군이 더 많았고 더 많은 상륙전을 감당했다. 영국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는 모두 영국에 설치된 미 해군기지 경계 병력 및 함정 승조원 등이었다. 영국 육군 및 휘하 코만도[8] 제2군[9] 소드 해변 배후: 제6공수사단 소드 해변: 제1코만도여단[10], 제41코만도대대, 제3보병사단, 제27기갑여단 주노 해변: 제46코만도대대, 제48코만도대대, 캐나다 제3보병사단, 캐나다 제2기갑여단 골드 해변: 제47코만도대대, 제50노섬브리아 보병사단, 제8기갑여단, 제79기갑사단[11] 미국 육군 제1군[12] 유타 해변 배후: 제82공수사단, 제101공수사단 오마하 해변: 제2레인저 대대, 제5레인저 대대,[13] 제1보병사단, 제29보병사단 유타 해변: 제4보병사단, 제90보병사단 휘하 제259연대전투단 3.1.2. 독일군[편집] B집단군의 사령관 겸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를 맡고 있었던 육군 원수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1943년 말 서부전선에 부임하면서부터 MBTI 성격유형검사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지뢰 지대와 해안 장애물, 벙커, 육해군 해안포[14] 및 야포 진지 및 공수부대의 강하와 공수를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했다. 롬멜의 방침에 따라 프랑스 해안 등지에 설치하게 될 지뢰는 약 2천만 개 정도가 될 것이며, 프랑스 내 여러 방어선을 구축하며서 매설할 양은 계획상 총 2억 개에 달하였다.[15] 실제로 1944년 5월 20일까지 해안에 설치한 지뢰의 수는 4,193,167개에 달하였으며, 이 중 2,672,000개가 롬멜의 지휘하에 매설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지뢰는 공수부대를 우려해 후방에 매설했다. 또한 5월 13일까지 총 517,000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31,000개는 기뢰였다. 이외에도 롬멜은 수도 없이 많은 장애물을 해안에 깔아두었는데, 해안 장애물의 목적은 연합군의 상륙주정들을 파괴시키는 목적이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해물들 중에는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설치된 장애물도 있었으며, 이들은 상륙 작전 당시 톡톡히 제 몫을 다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한 해변의 4개 구역 중 2개 구역만 상륙 개시일까지 완료되었고, 나머지 공사중이던 구간도 상륙 당일날 상륙부대보다 앞서 출발한 영국 해군 코만도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 외에도 공수부대를 막을 목적으로 롬멜은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지할 만한 지점에 30m 간격으로 높이 3m의 말뚝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말뚝만으로는 글러이더에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뚝과 말뚝에 전기가 통하는 선을 설치해 글라이더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말뚝 위에 달아놓아 글라이더를 폭파시킬 폭탄 100만 개를 준비했지만, 정작 MBTI 성격유형검사 상륙 당일까지 말뚝 설치가 완료된 곳은 거의 드물었다. 당시 독일군 방어부대의 배치는 아래와 같다. 유타 해변 - 육군 제709보병사단 오마하 해변 - 육군 제352보병사단,[16] 제726척탄병연대의 일부 골드 해변 - 육군 제716보병사단,[17] 제352보병사단 주노 해변 - 육군 제716보병사단 소드 해변 - 육군 제716 보병사단, 제711보병사단 3.2. D-day[편집] external/upload....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해안지도 왼쪽부터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순서 3.2.1. 공수작전[편집] attachment/06-10... D-day의 서막을 알린 것은 공수부대였다. 6월 6일 새벽에 미합중국 육군 제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 영국 육군 제6공수사단은 해안포 진지나 교량 등을 점령하기 위해 가장 먼저 노르망디에 강하했는데, 0시 15분에 본대에 착지 지점을 표시할 선도 부대(패스파인더)들이 강하됐고, 뒤이어 새벽 2시에 본대가 강하한다. 폭발물이 든 인형을 매단 낙하산을 대량 투하해 독일군의 주의를 일부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대공포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또한 이들이 오기 전에 롬멜이 일부 지역을 강을 이용해 늪이나 호수로 만들어놓았는데, 비록 이 늪들의 깊이는 채 50~60cm밖에 되지 않았지만 몇 십 kg에 달하는 무거운 군장과 강한 바람에 낙하산에 끌려다녀서 상당히 꽤 많은 수의 인원이 강하 후 낙하 장비를 풀다가 익사했다고 한다. 이때 미군 공수부대의 군장은 벨트를 3개나 풀어야 하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버튼 하나로 한 번에 장비 해제가 가능한 MBTI 성격유형검사 영국 공수부대보다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18] 그리고 당시 노르망디에는 강한 바람과 대공포의 저항으로 인해 수송기가 제대로 된 지역에 병사들을 떨구지 못해 거의 제대로 집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수부대원들이 제대로 부대를 정식 편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만나는 장병들끼리 모인 뒤 소부대를 임의 편성해서 임무를 수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 중에는 아예 소속 사단이 다른, 그러니까 101사단 소속 대원과 82사단 대원이 합류해서 소부대를 편성하는 사례나 영국 제 2공수사단과 미국 101사단 소속 대원이 합류해서 소부대를 편성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또한 강습용 글라이더[19] 또한 많은 사고를 낳는다. 3.2.2. 피의 오마하 해변[편집] attachment/1944 ...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 미군 제1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 테일러 오마하를 수비하던 독일군 352사단은 원래 태생이 동부전선에 투입될 보병사단으로 창설되었다가 임시로 방어임무를 맡은 것이었던 만큼 전력 면에서 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상륙한 지형과 노르망디의 지형이 비슷한 것을 알아본 롬멜의 혜안으로 인해 해안 방벽이 그나마 제대로 설치된 곳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상륙 당시 미군 병사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자면, 몇 백 미터를 넘는 거리에 각종 장애물들인 체코 헤지호그나 벨기안 게이트, 철망에 1700개의 대인지뢰까지 설치된 해안을 수천의 병력이 복닥거리면서 MG42와 105mm포 사격 등 무차별적인 사격을 뒤집어쓰고 지나가야 했던, 그야말로 헬게이트였다. 썰물 시 상륙을 진행한 것은 독일군이 상륙주정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밀물 시 딱 수면 높이까지 오는 위치의 나무말뚝이나 체코 헤지호그를 심고 그 위에 지뢰를 설치해놓았기에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는 독일군 해안벙커가 무력화되었을 시를 가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 전에 해안 거점을 포격, 폭격하였으나, 지원 포격이 대부분 빗나가 효과가 없었기에 도리어 상륙 병력들의 돌파거리만 늘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연합군의 전략이 동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전차 상륙에 실패했고, 캐나다군은 성공했다.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은 한 시간 늦게 밀물 때 상륙한 덕에 오마하 해변의 1/10도 안 되는 피해로 상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오마하의 경우 썰물에 상륙했음에도 수많은 보병과 전차가 해변에 수장된 건 덤이다. 덕분에 화력 지원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보병들이 큰 피해를 봤다. 그나마 보병과 동시에 상륙할 능력이 있었던 퍼니전차(DD 전차) 서른 대도, 전차 양륙함들이 포격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해안에서 먼 곳에서 전차들을 보낸 바람에 스물일곱 대의 DD전차들이 상륙도 못하고 가라앉아버렸다.[20] 미군 지휘부는 오마하[21] 해변을 서쪽부터 동쪽으로 에이블, 베이커, 찰리, 도그 그린, 도그 화이트, 도그 레드, 이지 그린, 이지 레드, 폭스 그린, 폭스 레드로 구성된 총 10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이 중 폭스 그린과 이지 레드 구역에 상륙했던 부대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일단 상륙 전에 아침식사로 각종 고기, 소시지, 계란 등 사기를 높이려고 제공한 아침 식사가 안 그래도 잔뜩 긴장감에 찌들어있던[22] 병사들에게 파도가 심한 바다에서 당연히 심각한 멀미를 유도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상륙 직전 장면에서 몇몇 병사들이 토하는 장면의 원인이다. 그러다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기관총 세례를 버티지 못하고 옆의 바다로 뛰어내린 병사들은 멀미에 체력이 바닥이 난 데다가 무거운 군장을 매고 있었기에 익사한 사례가 많았다. MG42[23]의 화력을 참고한다면 많은 병력이 한 번에 돌격해도 돌파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독일군 토치카 정면에 상륙하는 불운을 떠안았던 미 29보병사단 116연대는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 세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어떤 중대는 중대원 198명 중 상륙 개시 5분 뒤 단 2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당시의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로는 하인리히 제페를로가 있다. 실제로는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최초 상륙주정의 인원들은 문이 열리고 내려서 어느 정도 걸을 때까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그건 독일군이 최대한 적절한 사정거리 내에 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고, 이윽고 사정거리에 도달하는 순간 수많은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방어선 양단에 각각 설치된 단 2문의 8,8cm 포의 일제사격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에 깜짝 놀란 1차 상륙주정은 부상자 몇 명을 태우고 다시 상륙함으로 돌아가버렸다. 곧이어 바로 후속 상륙주정들을 보내는데, 그때부터 위의 사례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지옥이 펼쳐졌다. 상륙 직전 함포의 지원사격과 폭격기의 폭격이 전부 빗나가는 바람에[24] 독일군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고 진지의 피해도 거의 없었지만, 미군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겨버린 것. 사실 알았어도 별 도리가 없었다. 무조건 정시에 정해진 인원을 상륙시켜 점령하는 것이 작전의 주안점이었으니까. 이날 미군은 오마하 해변에서만 약 3,000여 명의 사상자(전사, 부상, 실종)를 내고 말았다. 엄청난 전사자를 낸 미군은 정말로 어찌어찌하여 도달한 독일군 벙커 앞에서 포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제16보병연대의 연대장이었던 조지 테일러(George A. Taylor) 대령이 선두로 돌격을 감행하면서 방어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때 상륙작전의 지휘를 맡은 오마 브래들리는 오마하 해변에서의 엄청난 피해로 인해 이곳을 포기하고 유타 해변 등에 상륙을 집중시키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아무튼 주노, 유타, 소드 등 다른 해변에서는 먼저 투입된 공수부대가 독일군의 포 진지를 잘 차단하였고, 별다른 저항도 없어서 대부분이 큰 피해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노 해변에서는 캐나다군이 독일군의 저항을 단 15분 만에 분쇄한 뒤 다른 해변의 독일군을 우회하여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는 유타 해변의 후방에 강하한 101 공수사단 이지 중대가 본대의 원활한 상륙을 위해 독일군의 포 진지를 공격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3.2.3. 푸앙트 뒤 오크(Pointe du Hoc)의 전투[편집] 한편 수만의 병력이 물밀듯이 상륙하는 동안 오마하 해변의 도그 그린에서는 225명의 미군 2 레인저 대대[25] 소속 병사들이 절벽에 도착한다. 이들은 오마하 상륙 부대를 위해 이 절벽 부근에 배치된 독일군의 직/곡사포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절벽 위로 특수한 박격포를 쏘아 로프를 걸친 뒤 상륙했다.[26] 그러나 바닷물에 젖은 로프 상당수가 절벽 위에 걸쳐지지를 못했고, 29개의 로프를 겨우 연결하고 20명 남짓 되는 사상자를 내면서 절벽 위로 올라간 그들은 독일군이 이미 진짜 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가짜 포를 설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해변의 미군은 포격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사실 지휘부 입장에서는 투입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상륙작전 직전에 기상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추가 정찰을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가진 정보를 기반으로 작전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 가진 정보들 상으로는 작전을 속행할 수밖에 없던 면이 있다. 어쨌든 다행히 정확히 이곳 지역에 있어야 했던 포들은 저어기 후방에 떨어진 공수부대가 발견하고, 포신에 폭탄을 주입하여 모조리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관광지에서 안내로 해주는 얘기에 따르면, 상륙부대의 한 장교가 소수의 부대만을 데리고 전방으로 정찰을 갔는데, 우연히 포들이 숨겨진 지역을 찾았다고 한다. 이때 독일군이 기막힌 우연으로 포들을 지키지 않고 잠시 철수해있었다고 한다. 이때 본대로 복귀하여 소정의 폭약을 갖고 포들을 무용지물로 만들고서 안전하게 철수했다. 돌아온 독일군들은 잠시의 시간 동안 고철이 되어버린 포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 일화의 경우 아래에서 언급되는 콜 오브 듀티 2 미션에서 포를 파괴하는 것까지 아주 충실히 재현되어 있다. 푸앙트 뒤 오크에는 독일군 사령부 건물 등이 있었던지라,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들의 공격이 그리 큰 헛수고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륙작전이 급했던 연합군은 반격한 독일군에게 포위된 이들을 제때 구원해 주지 못했고, 결국 이들은 81명의 전사자와 55명의 부상자 등 부대원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해당 지역은 현재 관광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엄청난 수의 포탄 구멍과 그 사이사이의 콘크리트 벙커가 있는 풍경이 밀덕, 역덕이라면 둘러볼 가치가 있다. 3.2.4. 유타 해변의 미군[편집] 오마하 해변의 미군들이 피와 살점을 깔아가며 겨우겨우 상륙에 성공한 것과 달리, 유타 해변에 상륙한 미군들이 맞닥뜨린 저항은 훨씬 덜했다.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 제709보병사단은 오마하 해변의 제352보병사단이 동부전선에서 돌아온 정예부대였던 것과 달리 상당수가 투항한 소련군 포로들로 구성된 동방부대 출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사기도 낮고 부대원 간 의사소통 문제가 심각하였다. 노르망디의 한국인으로 잘 알려진 동양계 독일 병사도 여기서 미군 포로가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 상륙한 미 육군 제4보병사단은 해류에 밀려 원래 상륙지점보다 남쪽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이곳의 독일군 방어거점은 사전폭격에 제대로 당해서 매우 허술한 상태에 있었다. 또한 상륙부대를 지원할 전차들도 상당수 제대로 상륙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원격조종 주행지뢰 골리아트까지 사용하며 방어에 나섰지만, 미군은 이 해변에서 197명이라는 비교적 소수의 사상자를 내면서 해변을 점령했다. 이때 독일군이 사용한 골리아트들은 죄다 미군의 훌륭한 장난감 신세로 전락하였다. 3.2.5. 골드 해변의 영국군[편집] 오마하 해변에서의 참혹한 전투에 가려 별달리 주목받지는 못하였지만,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 역시 꽤나 거센 독일군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영국군은 골드 해변을 킹, 지그, 아이템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섹터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기상 때문에 전차를 바로 상륙시키지 못하여 초반에는 독일군의 반격에 꽤나 고전하였다. 그러나 코만도 부대의 활약 및 전차들의 상륙[27]에 힘입어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15분 만에 주노 해변을 확보한 캐나다군이 곧장 우회하여 달려와 독일군을 소탕해 준 덕분에 오히려 한 시간 일찍 상륙한 옆 해변의 미군보다 더 빨리 주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골드 해변에서의 영국군은 약 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은 359명의 전사자와 574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다.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고작 200여 명의 사상자만이 나온 것을 보면 오마하 해변의 참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미 1군이 오마하 해변에서만 기록한 사상자 수가 3천여 명이고, 다른 해변의 사상자 수를 모두 합해 보았자 2천 명이 조금 넘을 정도다. 3.2.6.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편집] 미군이 담당한 오마하 해변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 지 불과 15분 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여 해변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회기동하여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이나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가 위에 서술한 대로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었고, 이는 오마하 해변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 수인 걸 감안하면,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의 방어가 운 좋게 허술해서 15분만에 장악한 게 아니라 적의 거센 저항을 제때 지원된 중장비들과 캐나다 병사들의 악과 깡으로 뚫어낸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3.2.7. 소드 해변의 영국군[편집] 3.3. D-day 이후[편집] 3.3.1. 멀베리항 건설[편집] external/upload.... 골드 해변에 지어진 멀베리 B 사진 상륙작전 성공 후 3일 뒤인 6월 9일에는 '멀베리(Mulberry)'라는 이름의 조립식 인공항구가 노르망디 앞바다에 가설된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상륙 이후 군수물자를 공급할 항구를 얼마나 빨리 점령하느냐였다. 노르망디 해안에 직접 선박을 정박시키고 물자를 하역하는 작업은 속도가 너무 느렸다. 더군다나 노르망디는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한 만큼 악천후로 물자 상륙이 중단될 가능성도 컸다. 그렇다고 노르망디 인근의 다른 항구를 점령하는 안을 채택할 경우 엄중한 독일군의 방어를 격파하고 기뢰를 제거해 안전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상륙작전 이후 유럽 본토 내부로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진공을 위해서는 군수물자의 원활한 보급이 필수였다. 결국 연합군 수뇌부는 여러 가지 변수와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노르망디에 인공 항구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942년 초 처칠은 연합작전본부장인 해군원수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용인 즉 바다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부두 시설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가능성 여부를 두고 논쟁하지 말고 어려움은 스스로 풀어나가라"고 하면서 부두 개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밝힌다. 명령을 받은 마운트배튼 중장과 예하 참모진은 그런 시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만 1년 이상을 보냈다. 당시 마운트배튼 제독의 참모였던 존 휴즈-할렛 해군 대령이 노르망디 해안 밖에 블록십(blockship, 항구 등을 막기 위해 침몰시키는 폐색선)들을 이용해 인공항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인공항 건설은 실마리를 찾는다. 우선 12척의 낡은 수송선을 썰물 때 해변에서 가까운 4.5m 깊이의 바다에 일렬로 가라앉혀 1.5km에 이르는 방파제를 만들었다. 또 암호명 '피닉스'로 명명된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를 썰물 때 바다에 빠트려 방파제를 조성했고, 암호명 '봄바르돈'인 물에 뜨는 방파제를 항구의 또 다른 보호막으로 삼았다. 상륙직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2개의 정박지를 건설하였다. 오마하 해변에는 미군이 건설한 멀베리 A, 그리고 골든 해변에는 영국군이 건설한 멀베리 B를 각각 미국과 영국이 관리하였다. 그리고 '웨일'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25톤 중량의 잔교들을 배열해 잔교마다 한 척의 전차상륙함을 접안시키거나 40톤짜리 처칠 전차를 올려놓을 수 있게 했다. 멀베리 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된 후 6월 9일 건설되었는데, 2주도 안 지난 6월 19일에 노르망디에 심한 폭풍이 불어서 멀베리 A가 부서져 버렸다. 그래도 멀베리 B는 살아남아서 약 6달 뒤 안트베르펀 항구를 점령할 때까지 연합군의 거의 유일한 항구였고, 안트베르펀 점령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개월 동안 약 250만 명의 장병과 50만 대의 차량, 400만 톤의 물자를 하역시킴으로써 연합군 승리의 초석을 마련한다. 3.3.2. 독일군의 반격[편집] attachment/Caran... 카랑탕에서 연합군의 M7 프리스트 자주포. 일단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상륙작전의 초기 목표인 셰르부르 항구로 미군이, 영국군은 노르망디의 중심 도시인 캉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지휘를 육군 B집단군사령관 롬멜과 서부방면사령관 육군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두 사람이 함께 맡고 있었고,[28] 또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로가 파괴되어 독일군의 이동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D-데이 오후까지도 OKW는 상륙 지점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상륙 작전 얼마 전에 각종 통신 장비와 철로를 파괴하기도 했는데, 물론 이들은 가차 없이 처형당하긴 했지만 이는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독일군이 첫 반격에 나선 것은 12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세밀하게 계획되지 않은 명령, 실타래처럼 엉킨 지휘권으로 인해 휘하 사단들은 자기가 B집단군인지, 서부방면군인지 소속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고, 당연히 명령권자가 없으니 사단들은 그 자리에 발이 묶여 있었다. 결국 D-데이 첫날 반격에 나선 부대는 캉으로 출동한 육군 제21기갑사단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격도 단 하루 만에 보유전차 146대가 76대로 줄어드는 막심한 피해를 보곤 캉에 틀어박혀야 했다. D+1일 서부전선의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무장 SS 제12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29]가 캉으로 증원되었다. 그리고 D-Day+2일 캉 주변지인 바이외가 영국군에 함락되면서 캉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한편, D-데이 당일 서부전선 최강의 부대였던 육군 기갑교도사단이 노르망디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무려 160km 밖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교도사단은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벌벌 떨면서 야밤에 전차가 자력주행으로 노르망디까지 이동해야 했다. 결국 이들이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일군 병력은 내륙에 밀려나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고, 기갑교도사단도 그쪽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분전도 있었다. 6월 13일 캉으로 가는 시골마을 빌레르보카쥬를 통과하던 영국 육군 제7기갑사단이 빌레르보카쥬 전투에서 미하엘 비트만 SS기갑중위가 이끄는 101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아홉 대에게 기습을 받아 28대의 전차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연합군의 캉 진격은 또 다시 늦춰지게 되었다. 한편 D-Day 당일 및 그 이후 상륙 교두보가 만들어질 당시, 교두보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격은 거의 없었다.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논쟁 작전 등을 통해 독일 공군의 항공기 생산력은 크게 떨어진 데다 연합군 공군의 압도적인 물량으로 인해 독일 공군은 교두보 공격은커녕 당장 동부전선과 서부 점령지에 배치된 항공기 및 기지의 방어에도 허덕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알려진 사례로 D-Day 당일, 단 2대의 Fw190이 기총 소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Fw190 중 1대를 조종한 사람이 독일 공군의 에이스인 요제프 프릴러 소령이었다. 노르망디 상공을 꽉 채운 연합군 항공기들을 피해서 살아 돌아온 건 프릴러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말 천운에 가까웠고, 그 천운 덕인지 프뢸러 소령은 종전시까지 살아남았다. 프릴러 외에도 제10 고속폭격비행단 등의 소규모 공격이 있었지만 프릴러의 예와 마찬가지로 거의 의미없는 출격이었다. 3.3.3. 연합군의 진격[편집] 그리고 상륙작전시에는 고려하지 못한 노르망디 특유의 지형이 연합군의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 당장 연합군은 시가지도 아닌 곳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보카주라고 불리는 1~4미터 정도의, 노르망디 농민들이 소유한 밭 사이의 경계로 삼기 위해 심어둔 키 작은 과일나무가 빽빽히 밀집한 벽으로 가득한 노르망디의 지형으로 인해 독일군이 이곳저곳에 아까 대활약한 티거 아홉 대는 물론 저격수나 대전차포를 매복시켜 뒀다가 한두 발 쏘고 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는 압도적인 항공 전력과 포병이 있었기 때문에 화력을 앞세워 독일군의 출혈을 강요했다. 또한 보카쥬도 미 육군 공병들이 처음에는 가방에 폭탄을 가득 넣어 뿌리째 날리는 방법을 쓰다가 위험하기도 하고 폭탄 낭비도 심해서 해안가에 버려진 대전차장애물(노르망디 하면 떠오르는 철골로 이루어진 그것[30])을 날카롭게 잘라 전차 앞에 용접, 말 그대로 과일 나무를 수확하면서 돌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독일 전차들이 길로만 다닐 때 미군 전차들은 나무를 헤치며 자유롭게 움직였다. 6월 22일 미 육군 선발대가 셰르부르에 도착했고, 25일에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셰르부르 수비대 사령부가 함락되고 사령관인 육군중장 카를-빌헬름 폰 쉴리펜(Karl-Wilhelm von Schlieben) 장군 (709보병사단 사단장. 첫날부터 격전을 벌여서 사단이 와해수준의 피해를 입어서 남은 병력이 있는 셰르부르로 쫒겨와서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과 해군소장 발터 헤네케(Walter Hennecke) 제독이 항복, 30일에는 잔여 병력의 저항이 중지되어 셰르부르가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만 항복 전에 헤네케 제독의 명령에 따라 해군 폭파반들이 항구를 개박살내놓아서 항구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히 해군 폭파반이 숨겨둔 부비트랩은 부설한 포로들을 직접 동원해 해체했음에도 끝내 발견 못한 것들이 수시로 폭발하며 연합군을 괴롭혔다. 쉘렌베르크와 헤네케 항복을 위해 미 육군 지휘소에 나타난 쉴리펜 장군(앞, 철모 착용자)과 헤네케 제독(바로 뒤, 정모 착용자). 높으신 분들임에도 코트가 진흙에 절어있는 것이 이들이 항복 직전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려준다. 6월 25일부터는 캉을 노리는 영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중간에 독일군이 히틀러의 재촉에 못 이겨 반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영국 육군 대신 해군의 함포 사격과 공군의 폭격을 신나게 맞고 후퇴해야 했다. 덤으로 방어 태세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러 베를린으로 날아간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헛소리만 듣고 왔고, 룬트슈테트는 서부방면군 사령관에서 짤렸다. 7월 11일, 히틀러 유겐트 사단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티던 독일군에 대해 영국 공군은 500여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아예 캉을 들어엎는 대폭격을 감행해 먼지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캉에는 70년 넘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폭격의 피해가 심했으나, 여전히 영국군은 캉을 돌파하지 못했다. 한편, 셰르부르를 점령한 미군은 셰르부르 남부의 생로를 점령하기 위해 또다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고, 7월 18일 결국 생로를 점령해 노르망디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연합군이 낸 사상자는 무려 12만 2,000명[31]에 달했다. 사실상 상륙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그동안의 전투에서 날려먹은 셈으로, 연합군의 주요 수뇌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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